2010년 3월 10일 수요일

드아이 맴.(3)

드아이 맴.(3)

 

 

6교시 후 교실청소를 끝내고 7교시 체육수업을 위해 나는 체육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겨울이라서 별의별 방법으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각자의 노하우가 숨겨져있는 때가 바로 이때이다. 누구는 체육복을 교복위에 그대로 껴입기도 하고 누구는 당당히 내복을 들어내며 ´이번 겨울도 걱정없겠어´라는 표정으로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씩 웃어주었다. 양말 두겁은 기본이고 심하면 내의도 두겁씩 입는 심히 그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운 녀석도 있었다. 뭐 나는 도저히 몸에 꽉 끼는 내복을 입는건 쑥스러워서 얇은 가을 츄리닝 하의만을 교복안에 입고 다니기 때문에 내복보다는 못하지만 시간과 노력 그리고 주위에 시선을 생각했을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남자반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내복을 고집하는 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녀 합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매우 파격적으로 솔직해진 녀석들이다. 그리고 여자반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제는 제법 반에 녹아들어서 친한녀석들도 생겼고 학기초 은둔형 외톨이격이던 내 상태도 많이 나아져있었다. 다만 얼래 내 성격이 이런건지 사고가 원인인지 감정에 너무 미숙하다는게 문제였다. 이런 내 성격이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놀려대는 녀석들이 이제는 정말 친구라고 느껴지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게 너무나도 즐거웠다. 내가 잃어버린 3개월을 새롭게 채워간다는 것이 정말로 너무나 즐거워서 이 녀석들과 함께있는 동안은 입가에 웃음이 끈이지 않았다.

˝넌 또 뭘 실실거려? 약 안먹었냐?˝

실실웃고 있는 나의 분노 게이지 약간 상승시킨 이 녀석은 민준이다. 반에서 거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녀석이다. 이녀석만큼 유쾌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정도 정말 같이 있으면 즐겁다. 학년에서도 수준급에 들어가는 성적으로 꽤나 믿음직하고 의지가 되는 녀석이다.

˝야 미술 선생님이다! 오늘은 빨간색 코트에 스타킹 그리고 스커트라.. 좋군!˝

아저씨같은 사고회로로 말을 하고 있는 이 녀석은 현민이로 보통 남자들 중에서도 심하게 여자를 밝히는 녀석이다. 다른건 다 괜찮은데 유독 여자에 관해서라면 눈에 불을 키고 이중적일만큼인 녀석이다.

˝너 그 말투좀 어떻게 안되겠냐?˝

˝왜 솔직히 말하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다 알면서? 라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는 녀석의 눈빛에 나는 이 녀석과 같은 녀석으로 취급당하는 느낌이들어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녀석의 목을 내 팔로 감은후 살짝 굽혀서 해드락을 걸었다. 그리고 서서히 힘을가하며

˝내가 넌줄 알아?˝

˝아, 아파. 너 아팠던 녀석 맞아?˝

˝훗, 이미 다 나았다고.˝

발버둥 치는 녀석을 보고 나는 오히려 팔에 힘을 더 주었다.

˝그만해, 그러다 다쳐.˝

우리둘의 장난에 끼어들며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를 말리는 이녀석은 유석이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녀석이어서 맨처음 이 녀석들과 어울리게 되었을때 가장 어려웠던 녀석이다. 뭐 알고보면 그 무뚝뚝함이 소심한 성격에서 나온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을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소심하다. 하지만 친해진다면 마치 군기반장같은 카리스마를 뿜어대는 신기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는 팔을 풀고 얼굴을 찌푸린 현민의 등짝을 한대치고 웃으며 걸어갔다. 사소한 잡담을 하며 체육관에 도착했고 오늘도 어김없이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웃기지 않냐? 어떻게 된게 맨날 자유시간이냐?˝

˝왜 넌 싫어? 난 좋기만 한데˝

˝나도 싫은 건 아닌데, 근데 여자 체육선생님은 없는 건가? 2학년이 되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뭐가 달라지길 바랬는지 딱 감이 오지만 이 녀석의 사상 근처에 접근하면 변태 소리 듣기 십상이라 나는 무시하는 쪽을 택했다. 민준은 체육관 가운데서 ´농구할 사람 빨리와 시간아까워´라고 소리 지르며 팀을 나누고 있었고, 나와 현민 그리고 유석이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는 거친 운동은 몸에 무리를 주기때문에 하지 말라는 의사선생님과 부모님의 충고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중이었고, 과거의 나와 민준을 제외하면 운동에 소질 있는 녀석은 우리들중 없었다. 한명은 입만은 수준급이고 한명은 무관심한 표정속에 숨겨진 그 소심함 때문에 공을 잡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테니까. 어느새 팀을 짜고 경기를 하고 있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나도 뛰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밀려왔지만 내가 생각해도 죽을힘을 다해 뛰어도 10분을 넘기기 어려웠기에 그저 몸만 근질근질 할 뿐이었다. 아까전부터 계속 여자 체육선생님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치고 있는 현민은 지치지도 않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는 유석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나는 그냥 그 사이에서 졸고 있었다. 코트에서 들리는 함성과 끼익 끼익하는 발소리의 리듬을 이루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해서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일찍 교실에 들어갔다. 얼른 체육복을 갈아입고 같이 따라온 두명과 남은 시간동안 수다를 떨며 한적한 오후를 보냈다.







어느덧 야자가 끝나면서 오늘하루 학교의 정규 일정도 무사히 끝마쳐졌다. 교문앞까지 같이 온 친구들에겐 작별을 고하고 나는 늘 하던대로 교문앞 벤치에서 혜민을 기다렸다. 나는 눈에 띠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여러번 교문에서 만나지 말고 집으로가는 길에 있는 공원에서 기다린다고 했지만 ´안돼! 반드시 교문앞에서 기다려!´ 라고 아무런 설명없이 못을 박아버렸다.

한동안 혜민이와의 별로 유쾌하지 않은 연애설이 들리기도 했지만 극구 부인하는 나로 인하여 근거없는 루머로 끝나게 되어 나에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녀석은 즐겁다는 듯이 ´기분좋아하지마! 이몸을 넘볼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라며 한동안 이상하다고 밖에 표현할수 없는 자기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이제는 제법 이런 모습이 익숙해 졌는지 주위 사람들도 아무런 관심없이 스쳐지나 간다. 하지만 처음엔 내게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특히 남자들의 그 알수 없는 시선은 다시는 경험할수 없는 경험이었다. 옛일을 떠올리는 동안 분홍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혜민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별로, 추우니까 얼른 가자˝

˝응!˝

보면 볼수록 이상한 녀석이다. 아무리 옆집에 사는 소꿉친구라고 해도 어렸을적에만 만났을뿐 중학교는 다른 곳을 다녔기에 병원에서 내가 혜민을 다시 만나기 전에는 기억속에 흐릿한 추억일 뿐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제는 내게는 어쩌면 가장 소중한 녀석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혜민이를 매우 모질게 대했었다. 병원에 있을때는 걱정하는 마음이나 위로하는 행위들은 내게 모두 하찮은 동정으로 여겨졌고 당연히 나는 비딱하게 굴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계속 내 옆에서 내가 보통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이끌어준건 틀림없이 바로 이 녀석이다. 아직도 나에겐 미스테리다. 아니 어쩌면 이녀석 자체가 미스테리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올것 같지 않아서 나는 내 성격상 그냥 물어보기도 이상해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해 버렸다.

˝이번 주말에 또 다같이 만나서 놀자!˝

˝다같이?˝

˝네 친구들이랑 신희랑 나이지˝

˝전 처럼 이상한짓 하려고 그러는건 아니지?˝

˝그건 이상한 짓이 아니라 어른스러운 짓이었다고!˝

언젠가 내가 혜민이에게 그 세명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처음에 놀라더니 금새 친해져서는 고등학생쯤되면 이렇게 노는게 정석이라는 듯이 쉴새없이 돌아다녔고 결국에 자신의 오빠의 신분증으로 술까지 사들고 와서 그날 처음으로 나는 필름이 끈어지는 경험을 했었다. 당연히 나는 엄격한 아버지에게 죽을 만큼 맞을뻔 했지만, 내 상태를 고려해서 용돈 삭감이라는 차마 두 눈을 뜨고는 견딜수 없는 극형을 당하게되었다. 나머지 애들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혜민이는 아무렇지 않은듯이 집에 들어가서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등교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낚였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민이는 여자라면 사죽을 못쓰니 한 외모하는 혜민이가 하는 것은 모두 정의라는 듯이 생각했고 유석과 민준은 이 녀석앞에서는 꼬리를 만 강아지 처럼 굴었다. 그 짓 두번 했다간 나는 차라리 집을 나가는 게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라고 외쳐주고 싶지만, 또 다시 안에서만 메아리치는 생각에 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표정이 왜그래? 설마 싫다는 건 아니겠지?˝

마치 거절한다면 당장 도서관에서 저주에 관한 주술을 찾아 직접 실천에 옴길지도 모를 녀석이다. 그러니 내가 어찌 거절할수 있을까. 그저 보일듯 말듯 인상을 찌푸린 후 웃으며

˝말은 해볼께˝

라고 하는게 최선이다. 왠지 모르게 이번에도 불길한 주말이 될것같은 느낌이 벌써부터 느껴진다. 아마 오늘도 쉽게 잠을 이루기는 틀린것 같다.





금새 일주일이 다 지났다. 나는 당연히 토요일밤 밤을 새서라도 평일날의 스트레스를 풀자는 마음가짐으로 마음껏 놀려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민준이는 공부를 핑계로 얼른 집에 가버렸고, 현민이는 아르바이트라는 이유로 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가버렸다. 결국 나와 유석이만 남아서 할수 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가는 길에 나는 문득 책방에 발을 디뎠다. 나는 병원에 있었을때 소설책에 매우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보내고 싶을때는 주로 소설책을 빌렸다. 내용은 다 엇비슷해서 어떤것이든지 부담없이 읽을수 있었고 오늘도 눈이가는 제목의 소설책을 한움큼 빌려버렸다. 허무하고 쓸데없어지만 스트레스해소나 상상하는 즐거움을 채워주는 일종의 활력소라고 할수 있겠다. 이번주 동안은 부모님이 집에 안계시기에 나는 정말 열심히 놀았고 정신을 차렸을때는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나야, 나!˝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오러가 듬뿍포함된 목소리로 혜민이는 힘차게 말을 이었다.

˝있잖아 내일 놀기로 우리 합의했잖아?˝

합의는 양자가 의견을 교환해서 하는 매우 민주적인 절차입니다. 단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위대한 이념을 독재주의의 수단으로 바꾸지 말라고.

˝내가 어제 아는 사람한테 이번에 이벤트용 놀이동산 입장권을 받아냈다고!˝

그 아는 분께 삼가 조의를 표하고 싶다. 부탁을해서 얻었거나, 그분께서 갈수 없는 사정이 생겨 그 티켓을 넘겨 주신것은 분명히 아닐것이다. 자기 스스로 당당히 받아냈다! 라고 말 하고 있지않은가.

˝그래서 놀이동산에 가자고?˝

˝응. 바로 그거야 재미있겠지?˝

놀이동산이라, 나는 일단 수학여행이랑 소풍이랑 그 등등의 단체로 노는 것은 다 놓쳐버렸기 때문에 은근히 이 녀석이 물고온 소식에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알았어. 가자고 까짓거˝

˝근데 문제는 티켓이 5장이야˝

˝나랑 너랑, 신희랑,현민이,유석이,민준이.. 하나가 모자르네?˝

˝그래서 그런데 너도 돈을 쓰기는 싫을테고,,,그냥 들어가는 방법도 있는데˝

˝뭔데?˝

˝히히히..˝

이 웃음. 내 즐거운 마음을 180도 회전시켜 버렸다. 한순간이라도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또 무슨일을 꾸미고 있을까?







이 놀이동산은 실내와 외부로 나누어져 있어서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실내는 매우 따뜻했다. 지하철역이랑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점으로 우리나라 거의 최고 수준의 놀이동산이다. 물론 놀이기구도 수준급이다. 추워서인지 놀이동산 내부에 사람들이 몰렸고 커다란 돔을 형성하고 있는 내부는 가는곳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바닥에 부딪치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지고 기계의 마찰음과 비명소리 등등이 모두 썩여서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루고 있는것 같았다. 나는 힘없이 걸으며 한손에 풍선을 들고 연신 나를 향해 사진을 찍어대는 아이를 대동한 부모님들과 외국인들의 표적이 되어버렸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이 놀이동산의 마스코트인 흰눈이 라는 캐릭터 인형속에 들어가 있는 중이다. 가뜩이나 불편한 몸인데 마치 사우나 같은 이 옷안에서 나는 탈진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치닿고 있는 듯 하다.

˝웃어봐!˝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질문과 웃음들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내가 그런 아이들을 딱히 좋아하는것도 아니었고 가끔 분별없는 아이들이 내 정강이를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때리는 매우 폭력성이 짙은 행위를 함에도 불구하고 샌드백이 되어주어야만 하는 그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기분이 안좋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당연히 혜민이다. 솔직히 아침만 해도 기분은 좋았다. 설마 내게 티켓을 안줄까 하는 안이한 생각이 내게 화를 불렀다고 할수 있겠다. 일행은 모두 도착했고 현민이는 당연히 제일 먼저 혜민이와 신희 앞에서 주절거렸고 민준과 유석은 나와함께 놀이공원 순회순서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놀이동산 입구 앞에서 혜민이는 놀이동산 직원복을 입은 사람과 가끔 나를 가르키며 뭐라뭐라 애기를 주고 받더니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직원용 통로를 통해 놀이동산내로 끌고 갔다. 나는 이유도 모른채 해맑게 웃으며 잘해라고 인사를 건내는 혜민이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체 직원복을 입고 있는 사람을 따라갔다.

˝이야! 훌륭한 학생이야. 오늘 일당은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해!˝

일당이라. 이거 왠지 위험한 분위기다. 라고 느낄 세도 없이 나는 분장실이라고 씌여있는 문안으로 들어갔다. 생각할 사이도 없이 급하다며 재촉하는 사람들에게 이유도 뭇지 못하고 나는 의상을 입었고 진실을 알았을때는 황당해 말을 할수가 없었다. 겨울 퍼레이드용 의상을 입어줄 아르바이트라고 한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이게 그 방법인가. 결과적으로는 나는 놀이동산엔 들어왔지만 나는 놀수 있는게 아니잖아. 어쨌든 나는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못하겠다고 할수 있는 사람도 아니어서 주위의 행렬을 따라 퍼레이드를 할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놀이동산을 순회하듯 돌아다니며 마스코트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는 중이다.

´나 뭐하고 있는거지?´

한탄에 한탄을 거듭하던 도중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커다란 곰돌이를 돌아보았다.

˝이정도에 지치면 되겠어? 우리 때는 말이지...˝

분장실에서 만난 사람으로 분잘실에서부터 이 커다란 곰돌이 의상을 입고 있었기에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말하는 넉두리로 봐서는 30대를 넘긴거 같았다. 사교성이 좋은지 나를 보자 마자 반갑다고 인사를 해오더니 완전히 친구처럼 나를 대했다. 그것도 단 10분만에. 내곁에서 한참을 자기 이야기를 하는 커다란 곰돌이를 나를 간신히 떨쳐내고 시계를 한번 보고는 다시 분장실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오전 퍼레이드는 끝난후 오후 퍼레이드까지의 나머지 시간은 자유라고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혜민이 일행을 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 상태로는 찾으러 가기도 힘들때니 분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혜민이 녀석을 만나면 반드시 한마디 해야겠다.







내가 분장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있었을때 분장실 근처 의자에 어디서 많이 본듯한 조금만 녀석이 팔짱을 키고 앉아있는게 보였다. 순간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고 서서히 다가갈수록 오히려 차분해져서 무시하며 지나갔다. 녀석은 내가 지나가자 나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뒤쫓아왔다.

˝어땠어? 재미있었어?˝

라고 나를 향해 외치는 녀석에게 냉정하던 감정은 다시 폭발할것만 같은 감정으로 바뀌어서 나는 아무런 말없이 분장실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쾅하는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닫았다. 가슴속에선 망설이는 감정이 나를 한쪽끝에서 붙잡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내 머리를 마비시킬수 있을만큼 얼굴을 붉게 만드는 이 기운을 이기지는 못했다. 나는 땀으로 가득찬 의상을 벗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주는 임시 직원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때 살짝 문이 열리며 혜민이게 이전의 그 해맑은 웃음으로

˝뭐야? 화났어? 다 잘됬잖아. 조금은 방법이 틀렸어도..˝

˝....˝

나는 이 히죽거리며 즐거운듯 말을 하는 녀석이 정말로 이때만큼 불쾌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사진도 많이 찍어두었으니까 나중에..˝

˝시끄러! 내가 니 마음대로 이용할수 있는 사람이야?˝

나는 결국은 참지못하고 언성을 높여 소리를 쳤다. 망설이는 감정들은 이미 굴복되어서 저 멀리 떠나간 후였고 소리를 치고 나니 답답한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전부터 난 니가 이해가 안됐어. 나랑 뭐하자는 거야? 가지고 노는 거야?˝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혜민이는 내가 소리를 치자 다시 그 작은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러운 행동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꺼져. 꼴도보기 싫어.˝

나는 왠지 그런 모습에 오히려 더 화가 치밀어서 아무렇게나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외쳤고 다시 뭐라고 말을 하려는 녀석을 문 밖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다시 쾅하고 문을 닫아버리고 아예 문을 잠가버렸다. 잠시동안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의자를 붙여서 털석하고 누워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경우가 과거에도 없었던건 아니다. 문화제때 전단지를 억지로 맡겨버리거나 체육대회 정리에 억지로 끌여들어서 하루종일 일을시키거나 시도때도 없이 불러내 나를 곤란하게 한 적이 이제는 손가락으로 셀수 없을 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웃으며 지나치거나 장난으로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이유는 나 조차 모르겠고 그저 여태까지 참아오던게 오늘 폭발했다고 생각해 버렸다. 언젠가 한번은 그녀석이 내게 하는 행위에 대해 못을 박아두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 20분정도 지나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는 의자에 반쯤 걸터앉아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숙여 잠을 자듯 눈을 감았다.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땀에 젖었을때 나는 악취가 내 몸에서 나는 듯해 나는 더욱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아까전 만났던 그 커다란 곰돌이가 들어왔다.

˝이봐, 학생. 그 여자애 울고 있었다고.˝

나는 계속 의자에 앉아 얼굴에 양손을 두고 허리를 기울인 채로 반응없이 있었다. 이 곰돌이가 혜민 이야기를 한것에 대해 조금 놀라기도 했지만, 딱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저 말없이 있을 뿐이었다. 곰돌이 의상을 벗고 그 안의 사람도 직원용 복으로 갈아입은뒤 나와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마시기 시작했다.

˝괜찮은거야? 남인 내가 이런말 하긴 좀 뭐하지만.˝

˝...괜찮아요.˝

나는 혼자있고싶은 마음에 조금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전혀 괜찮은거 같지 않은데...˝

나는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조금은 흐릿한 시야로 이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나는 눈을 찡그리고 뿌연 시야가 얼래되로 돌아올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아까 놀이동산내에서 애기를 주고 받았을 때는 30살 먹은 아저씨같은 이야기를 해대던 사람이 이제보니 20살 초반정도인 사람인것에 나는 당황했다. 과거에 어쩌고 저쩌고 한것은 그리 옛날일이 아닌거 같았던게 이해가기 시작했다.

˝임마. 남자가 여자를 울리면 안되지.˝

˝나도, 조금은 후회하고 있어요.˝

나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알고있었지만, 자연스럽게 내 입에선 변명이 흘러나왔다.

˝한두번 이런게 아니라서 참을려고 했는데 도저히 오늘만은 참을수가 없어서...˝

˝음. 그건 그렇지. 부처님도 삼세번이라고...˝

아까전처럼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쉬지않고 흘러나오는 이 이야기주머니를 멀리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마땅히 재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묵묵히 시간이 얼른 지나가 주기를 바랬다.

˝뭐 그런거지. 알겠지? 혜민이가 조금은 자아가 강해서 말이지...˝

끝나지 않고 계속되던 이야기속에서 나는 내가 아는 단어가 나온것에 정신이 번쩍들어 이 수다스러운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 왜,왜그래 갑자기?˝

˝혜민이를 알아요?˝

˝이런, 내가 말했니? 에휴 내가 조금만 한다는게...˝

이분도 조금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잘못이해하고 있는게 틀림없다. 거의 한시간을 넘기는 시간을 조금이라고 말하다니. 일단은 나는 이런 생각을 제쳐두고

˝혜민이가 변명해 달랬어요?˝

라고 조금은 공격적인 어조로 말을 걸었다.

˝아? 너 나 기억못해? 하긴 옛날이긴 하지. 나야 나.˝

˝무슨... 앗˝

자세히 들여다 보니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벼락을 맞은듯이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재환이형?˝

˝그래 나다. 혜민이 오빠! 녀석 그 얼굴은 여전하네. 그리고 아직도 시달리는거랑˝

나는 온몸에 전기충격을 받은듯 뻗뻗이 굳어서 할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사람은 혜민이의 하나뿐인 오빠인 재환이 형이다. 거의 혜민이 수준의 못말리는 성격이지만 나에겐 혜민이보다 무서운 사람으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어렸을적 혜민이와 다른 학교를 다니기전에 매일 모여서 놀았던 멤버가 나와 혜민이 그리고 재환이 형이었다. 그날의 기억들은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수 십번 왕복하는 기분을 주었던 끔찍한 나날이었다. 강 제방의 풀밭에서 보통 썰매를 타고 놀았는데 어느날 좀더 레벨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자전거에 썰매를 매달고 가속하며 썰매타기, 호랑이 할아버지네 불독때리고 오기, 비밀기지 만든다고 강제적으로 거둔 수금 등등 어린아이가 견딜수 있는 모든 불행의 피 실험자가 된 이가 굳히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을 것이다. 고작 1년 남짓이었지만 나에게는 공포의 나날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놀라며 경악하기엔 충분한 수준의 상황인것이다.

˝그때는 참 귀여웠는데 말이지. 이제는 징그럽다. 하하하!˝

그때 내가 어떻는지는 몰라도 형은 저에겐 악의 화신이었습니다. 다시 일방적으로 재환이형이 나에게 질문을 퍼붇기 시작했고 나는 마치 면접을 보러온 학생처럼 정성을 다해 그리고 가능한 트집 잡일 일 없도록 대답을 했다.

˝응. 그랬구나. 근데 왜 울린거냐?˝

나는 올게 왔구나 라는 심정으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재환이형은 정말 못말리는 트러블 메이커 였지만 동생인 혜민이에 관한 일이라면 매우 진지해지는 사람인걸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상세히 진실로만 이야기를 풀어갔다. 어렸을적 혜민이를 울린후 그뒤에 찾아온 고통을 상기하고 있었기에 나는 손에 식은땀이 나도록 긴장을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난후 재환이형은 음. 하며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 볼을 잡고 이리저리 당기며

˝너도 알거 아냐. 혜민이가 너한테만 그런다는거. 우리 가족한테도 그렇게 밝게 웃지 않는다고˝

나는 아무런 대답없이 그저 계속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내 볼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렸다.

˝이번에도 내가 여기 아르바이트 시작한걸 알고 티켓좀 달라고 했을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평소엔 부모님한테도 거의 부탁을 안한다고. 그래서 나도 할수 있는 만큼 노력했는데 한장이 모자르더라고. 그래서 한명은 내가 아르바이트로 데려간다고 해서 해결됬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어제밤에는 잠도 못잤어. 밤새도록 옷갈아입고 도시락 싸고 얼마나 난리였는데.˝

잠시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않는 공백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이 시간동안 많은게 머리속에 스쳐지나갔다. 나한테만 그렇게 웃는다고? 생각해보니 이녀석이 학교와 가정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게 없다. 반은 내 옆반이고 집도 바로 옆이고, 학교에서 인기많고 그리고.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오히려 내가 그녀석에 대해 알고 있는게 거의 없다는것에 대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가족이외에 그리고 사고후 처음으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혜민이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거의 없었다. 그저 옆에 있는게 당연했고 그게 자연스운 거라고 생각했다. 공기처럼 늘 곁에 있어서 소중한지 모른다는 식상한 어구가 계속 내 머리 속을 휘졌고 있었다.

˝어이, 내말 듣고 있어?˝

˝네?˝

˝어쭈, 내 별명을 잊어버렸나보네?˝

씩하고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는 재환이 형에게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남이 본다면 시원한 웃음이라고 같이 소리쳐 웃을지도 모르지만 내 기억에 저 웃음은 재환이형의 트러블 매이커 로써의 활약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머리속을 휘졌던 것들은 한순간에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해 버렸고 나는 후에 찾아올 알수 없는 공포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환이형은 갑자기 표정은 바꾸고는 진지한 어조로

˝내동생이라서 그러는게 아니라, 정말 여린애니까 잘좀 부탁한다.˝

라고 내 눈을 응시하며 말을 건냈다. 당연히 나는 어느 안전이라고 똑바로 서서 네 라고 군대에 갓 들어간 신참처럼 소리쳤다.

˝그래그래, 그럼 일단은 내 동생을 울린 빚은 내가 받아야 겠다.˝

그러면 그렇지. 다시 얼굴에 시원한 미소를 걸치고는 나를 껴안듯이 안아서 바닥에 던지더니 생각하는 사람 이라는 조각의 포즈로 손을 턱에 붙이고 잠시 생각을 한후 살며시 문 밖으로 빠져나가려 하던 나를 즐거운 미소로 바라보며 문을 닫아버렸다. 한참을 나를 이리 저리 굴리고 던지고 주위의 의상을 입히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재환이형에게 감히 대항할 마음없이 순순히 하라는 대로 수행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다시 어렸을적으로 돌아간 듯이 조금은 그리운 그 순진하고, 아팠지만 즐거웠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나를 가지고 자신은 할말큼 했다는 듯이 만족한 예술가처럼 자신의 작품을 감상한 후 자리를 떠났다. 나는 바닥에 누워서 잠시동안 그리운 이 감정을 즐기다가 다시 생각의 한편에 내려가있던 혜민이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번에는 나도 쉽게 사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재환이 형은 분명히

˝이 사진들 내가 꼭 간직하고 있을께, 얼른 화해해 안하면 알지?˝

라며 장난끼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소근거리고 떠났기 때문에 얼른 화해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뻔하였기에 나는 암담해 질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화해하자는 생각과 망설이는 생각이 팽팽히 대결하는 동안 어느덧 시간은 흘러서 하늘은 어둑어둑해 졌다. 저녁 퍼레이드가 생각난 나는 얼른 다시 그 흰눈이 의상을 갈아 입기 시작했고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놀이동산에서 한번도 놀이기구를 타지못하고 가야할것같다.





퍼레이드후 나는 놀이동산 밖으로 나와 지하철 역에서 혜민이를 포함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엔 현민의 번호가 몇번이나 찍혀있었지만 퍼레이드 중이라 나는 핸드폰 전원을 끄고 있었기 때문에 받을수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자니 이제곳 나올것 같아서 괜히 내가 전화해 노는것을 방해하기 보다는 이렇게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혜민이랑 만났을때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을 아직도 결심하지못했기 때문에서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었을때 현민이등등의 남자애들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야! 왜그랬냐?˝

현민이는 돌연 내 멱살을 잡고 화를 내기 시작했고 어느때 같으며 말렸어야할 유석이도 이번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왜,왜 이래? 내가 몰 했는데?˝

˝얼마나 심하게 울었는지 알아?˝

아. 그러고 보니 이녀석은 혜민이의 광신도였다. 아니 광신도는 아니고 거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위치를 고수하는 녀석이었다. 나도 가만히 당하지 않고 내 멱살을 잡은 손을 떨쳐내고 현민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일부러 그런건 아니야.˝

라고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는 옷 맵시를 고치는척하며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해볼려고 이야기를 꺼냈다.

˝놀이동산은 어땠어? 재미 있...?˝

말일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현민이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내 얼굴은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현민이 녀석이 내 얼굴을 주먹으로 쳐 올린것이다. 갑자기 맞은 주먹에 나는 정말로 눈앞이 회전목마처럼 돌기 시작했다. 나머지 녀석들도 이 상황에 놀랐듯 어쩔줄 몰라하며 현민이와 나사이를 가로 막고는 다급한 음성으로 애기를 주고 받았다. 민준이가 얼른 내 몸을 일으켜서 의자에 앉혀주었고 유석이는 계속 현민이를 붙잡고 이야기중이었다. 나는 말을 잃어버린듯이 가만히 앉아있다가 정신이 들자 내가 맞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현민이를 발로 차버렸다. 그리고는 넘어진 현민이에게 다가갔다. 다시 깜짝 놀란 나머지 두 녀석은 얼른 나를 잡고는 정신차려 라고 소리를 질렀고 역의 사람들은 이런 우리들을 재미있다는듯 또는 짜증난다는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현민이가 일어나서 유석이를 재치고 나에게 주먹을 날렸을때 이번에도 나는 민준이가 막고 있는 통에 얼굴을 내어줄수 밖에 없었다. 입술에 비릿한 맛이 나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러한 것은 느낄 사이도 없이 다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그만둬!˝

라고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혜민이는 놀랐듯이 달려왔고 신희는 우리를 바라보며 화가난듯 소리쳤다. 혜민이가 나타나자 현민이녀석은 아무일도 없었다는듯이 주먹을 내리고 아무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그에 지지않고 비릿한 맛을 느끼며 더욱 눈에 힘을 주었다. 결국엔 신희와 민준이가 현민이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갔고 나와 혜민이 그리고 유석이가 지하철 역에 남게 되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후 우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지하철을 탔고 성리역에 도착했다. 유석이는 다른 버스를 타기 때문에 먼저 떠났고 나와 혜민이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다시 머리속이 혜민이에 대한 것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묵묵히 기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어서 버스가 오는 도로 끝쪽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지금 주위에는 우리 둘뿐. 차라리 지금 사과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량한 자존심이 어째서인지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서 말을 걸려고 입을 열었다.

˝저기.˝

˝성현아.˝

우리는 동시에 말을 했고 이 영화에서나 나올것 같은 상황에 나는 더욱 당황했다. 나는

˝아.. 니가 먼저 말해.˝

라고 둘러댔지만 혜민이도 마찬가지로 나가 먼저 말해도 된다고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결국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나는 손을 꼼지락 거리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에 그저 아무런 말도 못하는 나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안해..˝

혜민이가 살짝 입을 열었고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미안해 라고 하는 것같았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기 혜민이를 처다보았다. 여태까지 한번도 이런 목소리를 들어본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 말이 내 가슴에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나도 얼른

˝아냐. 내가 .. 더 잘못했어.˝

라고 잘 열리지도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고 그래서인지 얼굴이 조금 붉게 변했다. 혜민이는 그제서야 조금은 밝은 듯한 목소리로

˝으-응.아니야. 이번엔 내가 정말 잘못했어. 난 니가 좋아할줄 알았는데... 이번엔 틀렸나봐.˝

이번에는 틀렸다? 얼마나 나에대해서 알고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어도 화해할 분위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갑자기 폭발한 거야. 아까 화내서 미안해.˝

다시 평소대로의 말투가 나오기 시작했고 녀석도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건냈다.

˝놀이동산 애기 해줄까?˝

갑자기 왜 놀이동산으로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관심이 갔기 때문에 나는 응 이라고 작게 대답했다. 놀이동산에서 놀았던 이야기를 들으니 오늘을 허무하게 날려보낸 내 처지가 정말 처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내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는 놀이동산 투어 계획을 떨쳐내지 못해서 더욱 아쉬웠다. 그리고 잠시후 31-3번 우리동네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의 브레이크 소리에 놀이동산 계획은 실 잃은 풍선처럼 멀리 사라져갔다. 이미 밤이 깊었는지 버스에 타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나와 혜민이는 버스 뒤쪽 2인용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혜민이가 날 위해 남겼다는 음식들을 주는 대로 다 먹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과자며 도시락이며 등등을 거의 다 먹고 난후 혜민이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졸린듯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나는 그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시내의 네온사인과 도로의 차의 깜박이는 붉은 빛과 노란 빛이 오늘은 왠지 더 아름답게 보였다. 갑자기 내 왼쪽 어꺠가 무거워져 고개를 돌리니 혜민이의 머리가 기대어져 있었다. 아직 네온사인의 불빛이 내 눈에 남았는지 혜민이의 모습에 알수 없는 떨림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왼쪽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감각에 나도 편안히 기분이 되어 서서히 눈을 감았다.